시와 문학/한국현대시

"오감도" - 이상(김해경)

킴차카007 2025. 7. 13. 05:36

 

팟캐스트해설

🌀 이상의 『오감도』– 기하학적 시 속에 담긴 시대의 슬픔과 한 사람의 추억

 

오늘은 한국 근대 문학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원형으로 불리는, 시인 **이상(李箱)**의 대표작 『오감도』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합니다.
그리고 이 시가 남긴 난해한 인상의 이면에 자리한, 시인의 삶과 그 시대의 어두웠던 배경, 그리고 저의 개인적인 추억까지 함께 풀어보려 합니다.

 

🌪 『오감도』 – 해설과 감상 요령

 

 

▪️ 시 해설 

 

『오감도』의 가장 큰 특징은 의미보다 형식에 있습니다.
서사적 맥락이 거의 없고, 등장인물도 개념화되어 있으며, 문장은 거의 수학적 추상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.

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단서를 통해 이 시를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.

  • 13인의 아해: 식민지 조선의 불안한 청년들 또는 집단화된 사회 구성원
  • 도로로 질주: 근대화, 산업화, 식민지적 강압 속에서의 강제적인 전진
  • 무섭다고 그리오: 개인의 고통, 공포, 예견된 파국

즉, 『오감도』는 기하학적 외양 속에 감정적 격동과 시대적 비명을 숨겨놓은 시입니다.

 

▪️ 감상 요령: 소리와 이미지로 느껴라

 

『오감도』는 ‘읽는 시’가 아니라 ‘느끼는 시’입니다.


따라서,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감상하면 시인이 말하고자 했던 불안과 혼돈을 더 가까이서 마주할 수 있습니다.

  • 문장을 낭독해보세요. 이상은 원래 소리와 율동을 중요시한 시인이었습니다.
  • 각 단어의 조합이 만들어내는 이미지의 충돌에 주목하세요.
  • 그 이미지들이 당신의 감각에 어떤 혼란을 주는지 느껴보세요. 그것이 바로 『오감도』의 정수입니다.
[영상시] 오감도(烏瞰圖) ㅡ 시 제1호 _ 이상 시인 / 낭송 _ 여운종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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🧩 시대적 배경: 암울했던 식민지 조선, 그리고 감각의 혼란

 

이상이 『오감도』를 발표한 시기는 1934년, 일본 제국주의의 압박이 조선을 깊숙이 잠식하고 있던 때였습니다. 언론, 문학, 일상 모두가 ‘검열’과 ‘자기검열’ 속에 갇혀 있던 시기였지요.

  • 『오감도』는 조선일보에 연재되었으나, 제15호를 끝으로 중단됩니다. 독자들이 난해하다고 반발했기 때문이었지만, 실제로는 그 시대가 이 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.
  • 기하학적이고 비인간적인 언어는 오히려 당대 사회의 병리와 폭력을 드러내는 방식이었습니다.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던 시대에, 그는 감각의 왜곡을 통해 저항했습니다.

 

🧠 천재 시인 이상의 삶과 직업들

 

 

 

본명은 김해경. 이상은 26세의 짧은 생애 동안 시인이자 소설가, 건축기사, 잡지 편집자, 그리고 화가로도 활동했습니다.
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:

  • 조선총독부 건축기사
    불과 18세에 조선총독부 건축기사가 되었으며, 그의 시 속에는 건축적인 질서감과 공간 의식이 녹아 있습니다.
  • 종로의 문학 살롱, ‘제비다방’ 운영
    제비다방은 당시 백석, 정지용 등 문인들이 모이는 장소로, 문학적 교류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.
이상이 살던 집터에 들어선 ‘제비다방’

 

  • 다방면의 예술 활동
    시는 물론이고 소설, 산문, 드로잉, 편지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약했습니다. 특히 단편소설 『날개』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.
  • 폐결핵과 요절
    일본에서 체포되어 고문을 받은 뒤, 병이 악화되어 도쿄에서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습니다.
  • 이상(본명 김해경, 1910~1937)은 27세의 짧은 생애 동안 누구보다도 강렬한 흔적을 남긴 인물이었습니다.

그는 현대문학을 창조한 ‘광기 어린 천재’로 기억됩니다. 괴팍했지만 예민했고, 난해했지만 한없이 애절했던 인물이었습니다.

 

💔 사랑과 동거 – 그와 함께했던 여인들

 

이상은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, 수차례 깊은 연애와 동거를 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.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바로 시인 김향안(본명 김혜경). 그와의 관계는 사랑이자 예술의 동지애였고, 때론 파멸적인 상처였죠.

  • 이들은 함께 살며 이상이 가장 창조적으로 불타던 시기를 보냅니다.
  • 김향안은 훗날 『이상의 아내』라는 회고록을 통해 그와의 삶을 기록하기도 했습니다.

이상에게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, 세계와 자신을 견디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습니다. 그것이 그가 늘 극단의 감정을 글로 승화시켰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.

화가 김환기, 김향안.....이상

 

🥂 동숭동 ‘오감도’에서의 기억

 

이 지점에서 저 역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꺼내고 싶습니다.
바로 지금의 아내를 처음 만났던 날, 두번째로  자리를 옮겼던 동숭동의 한 공간 – 이름도 **‘오감도’**였던 그곳입니다.

  • 1층은 카페, 2층은 경양식과 맥주를 파는 식당, 3층은 아마 전시공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.
  • 2층에서 생맥주와 돈가스(혹은 함박스텍였을지도요)를 앞에 두고 오랜 대화를 나누던 그날.
  • 벽면을 둘러싼 이상의 시 구절들이 인테리어처럼 박혀 있었고, 우리는 그 분위기에 젖어 있었습니다.
현재 동숭동 대학로

 

이상이 전하고자 했던 감각의 혼란과 시대의 무게가,

어쩌면 그때는 두 사람 사이의 낯설고 아름다웠던 첫 대화의 공기 속에도 녹아 있었던 것 같네요.

 

🌉 천재는 어떻게 식민지 시대를 버텼는가

 

이상이 감각을 해체하고 기하학을 시로 만든 이유는 단 하나.
그는 감정도, 말도, 현실도 모두 억압된 시대를 살았고,
그 억압된 현실을 벗어나는 길은 **‘언어 자체를 부수는 것’**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.

 

그의 난해함은 저항의 형식이자 살아남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.
그리고 그의 시는 여전히, 우리에게 **"그 시절의 공기와 감정"**을 날 것으로 들려줍니다.

 

📌 다음 글에서는 이상의 소설 『날개』를 중심으로,

그가 시인이자 이야기꾼으로 남긴 또 하나의 유산에 대해 이야기해보겠습니다.